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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장편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

by 정판교 2023. 1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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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과 화해하지 않았지만 다시 살아야 했다.두 달 남짓한 은둔과 근 기아 상태로 상당량의 근육이 소실되어있다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편두통과 위경련, 카페인 함량이 높은 진통제 복용의 악순환을 끊기 위해서는 규칙적으로 먹고 몸을 움직여야 했다. ​​그러나 제대로 노력해보기 전에 폭염이 시작되었다. 낮 최고 기온이 사람의 체온을 처음 넘어섰을 때 예전 세입자가 두고 간 에어컨을 틀어보았지만 작동되지 않았다. 어렵게 통화가 된 에어컨 수리 업체들은이상기온에 따른 예약 폭주로 8월 하순에야 출장을 올 수 있다고 말했다.신제품을 사려 해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어디로든 에어컨이 있는 곳으로 피하는 편이 현명했을 것이다.하지만 사람들이 모여 있는 카페나 도서관, 은행 같은 곳으로는 가고 싶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실 바닥에 등을 붙이고 누워 가능한 한 체온을 낮추는 것, 땀구멍이 막혀 열사병에 걸리지 않도록 자주 찬물 샤워를 하는 것, 거리의 열기가 조금이나마 식은 저녁 여덟 시경에 집을 나서 죽을 먹고 돌아오는 것이었다.​냉방이 된 죽집의 실내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쾌적했고, 안팎의 기온차와 바깥의 습도 때문에 겨울밤처럼 김이 서린 유리문 밖으로는 휴대용 선풍기를 가슴 위로 켜 들고 귀가하는 사람들의 물결이 이어졌다. 이제 곧 내가 다시 걸어들어가야 할, 영원처럼 식지 않는 열대야의 거리를 채우며.​ 그렇게 죽집을 나와 집으로 돌아오던 어느 밤, 아직 달궈진 차도의 아스팔트로부터 세차게 불어오는 열풍을 얼굴에 맞으며 신호등 앞에서 있었다. 편지를 이어서 써야 한다고 그때 생각했다. 아니 새로 써야 한다고. 유성 사인펜으로 겉봉에 유서, 라고 적어둔, 수신인을 끝내 정하지 못했던 그 글을, 처음부터 다시,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그걸 쓰려면 생각해야 했다.​어디서부터 모든 게 부스러지기 시작했는지.언제가 갈림길이었는지.어느 틈과 마디가 임계점이었는지.

- 한강 장편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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